왕 앞에서 증언하는 부활의 소망
죄목을 설명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과 자신을 돌이킨 부르심을 연결하며, 왕을 포함한 모든 청중이 같은 은혜에 참여하기를 구한다.
죄목을 설명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과 자신을 돌이킨 부르심을 연결하며, 왕을 포함한 모든 청중이 같은 은혜에 참여하기를 구한다.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선 사람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과 논쟁을 아는 왕 앞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인내해 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과 바리새인으로 살아온 엄격함을 말하지만, 그것을 구원의 자격으로 자랑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지금 문제 되는 증언이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과 연결된다는 점을 밝힌다.
그는 열두 지파가 밤낮 하나님을 섬기며 바라는 약속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이 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묻는다. 열두 지파라는 표현을 당시 모든 사람의 지파별 신원이 완전히 확인되었다는 통계처럼 읽을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약속과 소망의 언어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 소망과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드러낸 사건으로 제시된다.
확신 속에서 행한 폭력을 고백하다
바울은 자신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거슬러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인정한다. 제사장들의 권한을 받아 성도들을 가두고 죽음에 찬성하며, 회당에서 벌하고 모독하도록 강요했다고 말한다. 양심의 확신이 잘못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었음을 자기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 청중의 확신도 하나님의 실제 일하심 앞에서 다시 살펴야 한다.
죽일 때 찬성표를 던졌다는 표현만으로 바울이 공회의 정식 의석을 가진 회원이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된다. 동의와 참여를 나타내는 표현을 모든 제도적 이력으로 확대할 수는 없다. 누가가 밝히는 것은 그의 책임 있는 가담이다. 부르심의 영광을 강조하려고 과거 범죄의 권한을 부풀리거나 반대로 은혜받았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약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밝은 빛과 종으로 세우는 부르심
다메섹 길에서 해보다 밝은 빛이 바울과 동행자들을 둘러 비추고 모두 땅에 엎드린다. 주님은 박해의 무익함을 가시 채를 차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속담은 예수의 뜻을 거슬러 자기 확신을 밀어붙이는 길이 결국 자신을 해침을 드러낸다. 바울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면의 회심 준비를 해 왔는지 본문 밖의 심리 과정을 확정할 수는 없다.
이번 회고에서는 예수께서 바울을 종과 증인으로 세우시는 사명이 집중해서 제시된다. 9장과 22장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설명된 내용이 여기서는 주님의 부르심 안에 모여 있다. 이를 모든 말이 같은 순간 같은 순서로 들렸다는 녹취록으로 고정하기보다, 바울이 왕 앞에서 사명의 근원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야 한다. 공통의 핵심은 박해하던 예수께서 그를 모든 사람을 향한 증인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눈을 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
사명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거룩한 이들 가운데 유업을 받는다. 바울 자신이 잠시 보지 못했던 경험과 다른 사람의 눈을 열도록 보냄받은 사명이 서로 비춘다. 그는 스스로 빛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하늘의 환상을 거스르지 않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며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했다고 말한다. 선행으로 은혜를 사라는 명령이 아니라 돌이킴이 삶의 방향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요청이다. 작은 이와 큰 이에게 같은 증언을 전했고,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한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부활의 빛을 선포한다고 설명한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른 복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말과 청중을 향한 직접적인 질문
베스도는 큰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한다고 외치지만, 바울은 진리와 분별의 말을 한다고 답한다. 왕이 아는 사건은 구석에서 은밀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예언자들을 믿는지 직접 묻는다. 복음은 바울 혼자만 확인할 수 있는 비밀 체험의 권위에만 서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 말이 당시 모든 사람이 모든 사실을 이미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그립바의 대답은 짧은 말이나 적은 설득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 하느냐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왕이 거의 회심했지만 마지막 순간 놓쳤다는 내면의 확정 보고로 읽지 않아야 한다. 진지한 반응인지 거리를 두는 반어인지 본문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 차이를 계산해 자랑하는 대신 듣는 모든 이가 자신의 믿음에 참여하기를 하나님께 구한다.
이 사슬만 제외하고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울은 시간이 짧든 길든 모두 자신처럼 되기를 바라되 이 결박은 제외한다고 말한다. 자기가 겪는 억압을 청중에게도 그대로 겪게 하려는 복수가 아니다. 갇힌 사람은 자유로운 권력자들을 미워하여 파멸을 구하기보다 그들이 같은 은혜와 소망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결박의 고통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왕과 총독 등은 물러나 죽음이나 투옥에 해당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아그립바는 상소하지 않았으면 놓아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바울이 상소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망쳤다는 최종 평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 발언은 관리들의 판단이며 독자는 이미 로마에서 증언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알고 있다. 무죄가 확인되면서도 로마로 가는 길이 구금의 형태로 이어지는 역설 속에서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이스라엘의 약속과 소망 안에서 설명한다.
- 부르심은 죄 사함과 유업을 전하며 회개에 합당한 삶을 요청하는 사명이다.
- 바울은 권력자들의 회개를 강요하지 않고 같은 은혜에 참여하기를 기도하며 결박 속에서도 증언한다.
아그립바가 거의 회심했다고 확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 보기
그의 말은 짧은 시간이나 적은 설득에 대한 질문 또는 반어로도 읽히며 내면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바울이 모든 청중의 믿음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슬을 제외하고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무엇이 함께 담겨 있는가?
설명 보기
자신을 가둔 사람도 은혜에 참여하기 바라는 사랑과, 결박의 고통을 가볍게 미화하지 않는 인식이 함께 담겨 있다. 증언은 복수나 고난의 강요가 아니다.
함께 읽는 성경
- 이사야 42:5~9: 눈을 열고 어둠에서 이끌어 내는 종의 사명은 바울의 부르심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 누가복음 24:44~49: 성경의 약속,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모든 민족을 향한 회개의 증언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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