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26~52

부활과 죄 사함, 엇갈리는 응답

약속의 역사를 되짚은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했는지 설명한다. 같은 말씀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응답과 거센 반발을 함께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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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역사를 되짚은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했는지 설명한다. 같은 말씀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응답과 거센 반발을 함께 일으킨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함께 형제라고 부르며 구원의 말씀이 그들에게 보내졌다고 선언한다.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안식일마다 읽던 예언자의 말씀도 깨닫지 못했다. 종교적인 언어와 낭독의 반복만으로 그 뜻을 충실히 받아들인다고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경고이다.

그들이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도 빌라도에게 처형을 요구했다는 설명은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불의한 판단을 선한 행위로 바꾸지는 않는다. 또한 이 사건에 참여한 특정 사람들의 책임을 이후 모든 유대인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 바울 자신과 이 말을 듣고 따르는 많은 사람도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무덤에 놓인 분과 하나님이 살리신 분

사람들은 예수를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두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함께 온 이들에게 여러 날 나타나셨고 그들이 지금 증인이라고 설명한다. 복음은 지도자들의 실패를 폭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로운 일을 전한다.

32~33절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자손들에게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시편 2편을 연결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예수께서 그때 처음 신적인 존재가 되셨다는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왕의 세움과 약속의 성취라는 문맥에서 부활이 예수의 정체와 주권을 드러낸다. 34절 이후는 다시 썩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부활을 더 분명히 설명한다.

다윗의 무덤을 넘어서는 약속

바울은 이사야 55장의 다윗에게 주신 확실한 은혜와 시편 16장의 썩음을 보지 않는 거룩한 이를 함께 읽는다. 다윗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섬긴 뒤 죽어 썩음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는 그러하지 않다. 성경의 인물을 존중하는 일과 그를 마지막 소망의 근원으로 삼는 일은 구별된다.

이 연결은 구약의 문장을 원래의 역사와 무관한 암호로 바꾸는 방법과 다르다. 다윗에게 주신 언약과 왕의 소망이 어떻게 죽음을 넘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 독자는 인용된 구절뿐 아니라 각 시편과 이사야의 더 넓은 약속을 함께 읽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은 성경에 우연히 닮은 문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행동으로 선포된다.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믿는 이에게 전하다

38~39절에서 설교는 청중의 현재로 돌아온다. 예수를 통해 죄 사함이 선포되고 믿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모세의 율법이 이루지 못한 해방을 예수께서 이루신다는 말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나쁜 분이거나 구약에 은혜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죄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이 예수께 있다는 선언이다.

하박국의 경고는 놀라운 일을 듣고도 업신여기며 거절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설교자는 소식을 전하고 응답을 요청하지만 믿음을 강제로 만들지는 않는다. 회당 모임 뒤 많은 유대인과 경건한 개종자들이 따라오자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라고 권한다. 시작의 열광보다 지속적인 은혜의 삶이 중요하다.

거절과 이방인 선교를 민족의 교체로 읽지 않기

다음 안식일에 큰 무리가 모이자 반대자들은 시기하여 논박하고 모독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전해야 했던 말씀을 그들이 밀어내므로 이제 이방인에게 향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다음 도시에서도 회당에 들어간다(14:1). 그러므로 여기의 전환을 하나님이 모든 유대인을 영구히 버리셨다는 전면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 49:6의 땅끝까지 이르는 빛은 이방인 선교가 이스라엘의 성경 밖에서 갑자기 생긴 계획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말씀을 높인다. 같은 자리에는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 반대하는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 독자는 민족별로 선악을 나누기보다 구원의 말씀 앞에서 엇갈리는 응답을 보아야 한다. 박해에 동원되는 유력한 여성들이 있다는 기록도 앞서 믿는 이들의 참여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지위나 성별 하나로 복음에 대한 모든 반응을 예측할 수 없다.

영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응답

48절은 영생을 위하여 정해진 사람들이 믿었다고 말한다. 개혁 전통은 이런 표현을 믿음에 앞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연결하고, 웨슬리·아르미니우스 전통은 모든 이를 향한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을 함께 강조한다. 후자의 입장이 인간의 공로로 구원한다는 뜻은 아니며, 전자의 입장도 전도와 실제 믿음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절을 단순히 사람들이 스스로 영생을 선택했다는 말로 바꾸면 수동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주도성을 약하게 만든다. 반대로 앞의 거절에 대한 책임과 뒤의 실제 전도를 지우면 문맥을 잃는다. 박해로 두 사도가 떠난 뒤에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다. 은혜의 열매는 한 지도자의 체류나 지역 권력의 호의에 완전히 매여 있지 않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예수의 부활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죽음을 넘어 이루신 하나님의 행동이다.
  • 예수를 통한 용서와 의롭다 하심은 믿는 사람에게 선포된다.
  • 엇갈리는 응답 속에서도 이방인을 향한 말씀의 길은 열리며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기뻐한다.
함께 생각해요

13:46을 모든 유대인에 대한 영구적인 거절 선언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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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유대인이 믿었고 두 사도는 다음 도시에서도 회당에 들어간다. 이 자리의 특정한 반대와 이방인에게 향하는 사명을 민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정으로 바꿀 수 없다.

함께 생각해요

13:48을 읽을 때 함께 붙들어야 할 문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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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 실제로 말씀을 믿는 응답, 말씀을 밀어내는 사람들의 책임, 계속되는 전도를 함께 보아야 한다. 한 절로 이 요소들 가운데 일부를 지우지 않아야 한다.

함께 읽는 성경

  • 이사야 49:1~6: 종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땅끝에 이르는 구원을 함께 품는다.
  • 로마서 3:21~31: 율법과 믿음,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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