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창조주와 부활을 전하다
아테네에서 기다리는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를 보고 회당과 광장에서 대화한다. 이스라엘의 성경을 모르는 청중에게도 창조주와 부활, 회개의 소식을 이해할 길을 찾는다.
아테네에서 기다리는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를 보고 회당과 광장에서 대화한다. 이스라엘의 성경을 모르는 청중에게도 창조주와 부활, 회개의 소식을 이해할 길을 찾는다.
도시를 관찰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다
바울의 마음은 우상으로 가득한 아테네를 보며 격해진다. 그러나 그 반응은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신전을 부수는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는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상에 대한 비판은 실제 청중을 듣고 대화하는 책임과 함께 이루어진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그와 논쟁한다. 어떤 이들은 그를 주워들은 말을 옮기는 사람으로 낮추고, 어떤 이들은 낯선 신들을 소개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와 부활을 들었지만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단어를 전했다는 사실만으로 전달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청중이 무엇으로 오해하는지 살피는 일도 증언의 일부이다.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접점에서 시작하다
아레오바고에서 설명할 기회를 얻은 바울은 청중이 종교적인 관심이 많음을 언급하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친 제단을 이야기한다. 이 접점은 그 제단의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아무 차이 없이 같다는 승인이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면서 예배하는 대상을 이제 알려 주겠다고 하며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도록 요청한다.
아레오바고는 장소와 공적 모임의 성격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명칭이지만 본문은 정식 형사재판 절차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새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도시라는 설명은 청중의 호기심을 보여 주면서도, 새로운 정보를 소비하는 것과 삶을 돌이키는 것이 다름을 드러낸다. 설교는 흥미로운 종교 지식을 하나 더 추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세계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소개한다. 사람이 만든 신전에 갇히지 않으시며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분도 아니다.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오히려 하나님이시다. 종교 행위를 통해 신의 필요를 채워 대가를 얻는 관계가 뒤집힌다.
이 말은 모든 예배 장소나 공동체의 섬김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건물을 유지해 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예배와 봉사는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생존시키는 거래보다 먼저 주어진 생명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헌금과 종교적 활동을 하나님의 호의를 구매하는 수단으로 만들면 바울이 비판하는 틀을 다시 가져오게 된다.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은 우리의 감사와 섬김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다시 묻게 한다.
한 근원에서 나온 민족들과 가까이 계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드시고 살아갈 때와 경계를 정하셨다는 설명은 인간의 공통된 근원을 강조한다. 특정 민족이 본성적으로 더 신적이거나 덜 인간적이라는 서열을 세울 수 없다. 동시에 모든 현대 국가의 국경과 권력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는 정치 지도로 이 말씀을 사용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도록 하시며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바울은 청중의 시인들이 말한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이용한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한 신이거나 모든 종교가 같은 결론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다. 창조주께 생명을 의존하는 존재라면 그분을 금과 은과 돌로 만든 형상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논증으로 이어진다.
공통 언어를 사용하되 회개의 요청을 피하지 않다
바울은 청중의 종교와 시에서 말을 가져오지만 그 체계 전체를 승인하지 않는다. 창조주와 피조물, 주시는 분과 받는 사람의 관계를 새로 설명한다. 독자가 오늘의 문화와 대화할 때도 접점을 찾는 일과 신앙의 핵심을 바꾸는 일을 구별할 수 있다. 이해할 말을 사용하는 것과 듣기 좋은 결론만 제공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하시며, 정하신 분을 통해 세상을 의롭게 심판할 날을 세우셨다. 이전 무지를 지나치셨다는 말은 우상숭배가 옳았다는 판정이 아니다. 오래 참으신 시간과 지금 주어진 응답의 책임이 함께 나타난다. 설교는 창조의 보편성에서 출발하여 부활하신 한 분과 심판이라는 구체적인 선언으로 나아간다.
부활 앞에서 갈라지는 반응과 남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일은 심판의 확증으로 제시된다. 부활을 듣자 어떤 이들은 조롱하고 어떤 이들은 다시 듣겠다고 한다. 더 듣겠다는 말이 진지한 탐구인지 결정을 미루는 태도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본문은 모든 마음을 판정하지 않는다. 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다른 이들은 믿고 합류한다.
이 결과를 바울의 완전한 실패라고 하여 이후에는 철학적 대화를 모두 버렸다고 설명할 근거는 없다. 반대로 도시 전체가 믿게 된 대성공으로 과장할 수도 없다. 누가는 조롱과 유보, 믿음이 함께 일어난 사건을 남긴다. 증언의 충실함은 청중의 즉각적인 숫자로만 판정되지 않으며, 한 자리에서 여러 반응이 나타난다는 현실 속에서도 말씀을 분명히 전하는 책임은 계속된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바울은 아테네의 종교와 언어를 관찰하여 창조주를 설명할 접점을 찾는다.
- 모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과 거래에 갇히지 않으신다.
- 문화와의 대화는 회개와 심판, 예수의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복음의 선언으로 나아간다.
청중의 제단과 시를 언급한 행동은 그들의 모든 신앙을 승인한다는 뜻인가?
설명 보기
아니다. 바울은 익숙한 말에서 시작하되 창조주와 인간, 형상과 예배의 관계를 새롭게 설명하며 회개를 요청한다. 접점을 사용하는 일과 종교 체계 전체를 승인하는 일은 다르다.
아테네에서의 결과를 단순한 실패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 보기
조롱과 유보뿐 아니라 실제로 믿고 합류한 사람들도 기록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도시 전체의 성공이나 전적인 실패라는 단순한 평가보다 엇갈린 응답을 남긴다.
함께 읽는 성경
- 이사야 44:9~20: 사람이 만든 형상에 생명의 근원을 의지하는 모순을 예언서에서 더 살필 수 있다.
- 로마서 1:18~25: 창조주를 아는 단서와 피조물을 경배하는 왜곡의 관계를 바울의 논증과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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