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1~27

재판정의 변론과 미루어진 정의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공식적인 고발을 듣고 답한다. 법정의 언어는 소동과 성전 모독의 혐의를 주장하지만 바울은 부활의 소망과 실제 사실을 구별하여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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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공식적인 고발을 듣고 답한다. 법정의 언어는 소동과 성전 모독의 혐의를 주장하지만 바울은 부활의 소망과 실제 사실을 구별하여 설명한다.

칭찬의 서두 뒤에 놓인 무거운 고발

닷새 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 변론가 더둘로가 내려온다. 더둘로는 벨릭스 덕분에 평화와 개선을 누린다는 칭찬으로 말을 시작한다. 이 찬사는 고발자가 재판장의 호의를 얻기 위해 하는 발언이지 누가가 총독의 모든 정치를 평가한 결론은 아니다. 법정에서 들리는 말도 말하는 사람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발은 바울을 전 세계 유대인 가운데 소요를 일으키는 자, 나사렛 분파의 우두머리, 성전을 더럽히려 한 자로 묶는다. 종교적인 논쟁을 제국이 다루어야 할 치안 문제와 연결하는 전략이다. 일부 번역에는 6~8절에 루시아가 강제로 빼앗았다는 문장이 더 길게 나타나지만 주요 현대 본문에는 그 추가 부분이 없다. 사본에 따른 문장 차이를 본문의 모순이나 숨겨진 사건으로 꾸미지 않아야 한다.

기간과 장소,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을 말하다

바울은 재판장의 오랜 경험을 언급한 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성전이나 회당, 도시에서 무리를 선동하는 일이 발견되지 않았고 고발자들이 주장하는 일을 입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감정만으로 변론하지 않고 기간과 장소, 목격과 증명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설명은 믿음의 증언과 별개의 세속적 기술이라고 무시되지 않는다.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상대 주장에 증거를 요구하는 일도 책임 있는 태도이다. 한편 법정에 세워졌다는 사실만으로 범죄자라고 판단하거나, 고발자의 직함과 수가 많다는 이유로 그 말이 옳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누가는 독자가 앞서 본 사건과 현재 고발을 계속 비교하도록 한다.

그 길을 부정하지 않는 피고

바울은 그들이 분파라고 부르는 그 길을 따라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예수에 대한 믿음을 숨기거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말한다. 복음은 조상들의 성경을 버리고 아무 상관 없는 신을 섬기는 길로 제시되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소망은 삶의 책임을 약하게 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려 힘쓴다고 덧붙인다. 미래의 부활과 심판은 현재를 피하는 관념이 아니라 오늘 무엇을 행하는지 살피게 하는 소망이다. 물론 바울을 고발한 모든 사람이 부활에 관해 같은 신학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며, 앞 장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차이도 기억해야 한다.

구제하러 온 사람에게 붙은 소동의 혐의

바울은 여러 해 만에 자기 민족을 위한 구제와 예물을 가지고 왔고, 정결하게 되어 성전에 있을 때 아시아 출신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그때 군중이나 소동이 자기 곁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을 돕고 예배하려는 방문과 성전을 더럽힌다는 고발 사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연보는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의 관계를 물질적인 책임으로 연결한다.

실제로 현장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여기 와서 고발해야 한다는 지적도 중요하다. 공회 앞에 있던 사람들이 밝힐 수 있는 내용과 처음 사건의 목격이 서로 구별된다. 바울은 자신이 말한 부활의 소망 외에 어떤 범죄를 찾았는지 묻는다. 독자는 종교적 견해의 차이와 입증된 범죄 행위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위험을 보게 된다.

알고 있으면서도 미루는 총독

벨릭스는 그 길에 관하여 비교적 잘 알고 있으면서 루시아가 오면 결정하겠다며 심리를 미룬다.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하고 친구들이 돌볼 수 있게 하지만 석방하지는 않는다. 부분적인 편의가 정당한 결론의 지연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누가는 총독을 완전히 무지해서 오해하는 사람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과 책임 있게 판단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남는다.

이후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듣는다.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논하고 벨릭스는 두려워하여 적당한 때 다시 부르겠다며 돌려보낸다. 복음의 설명은 권력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의 현재 삶을 비추는 요청이 된다.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회개와 같은 것은 아니다.

자주 듣는 것과 응답하는 것은 다르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 기대도 품고 자주 불러 대화한다. 반복되는 만남이 모두 진지한 믿음의 탐구였다고 낭만화할 수 없다. 종교적인 대화를 즐기면서도 부당한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 누가는 그의 내적 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말씀을 듣는 빈도와 삶의 변화가 자동으로 비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두 해 뒤 보르기오 베스도가 후임으로 오지만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으려고 바울을 갇힌 채로 둔다. 바울의 자유가 정치적인 계산의 수단이 된 것이다. 주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도 이런 지연의 시간을 겪는다. 독자는 복음의 길이 이어진다는 소망을 붙들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고 타인의 시간을 이용하는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아야 한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바울은 선동과 성전 모독의 혐의를 구체적인 사실과 입증의 문제로 반박한다.
  • 그는 조상들의 하나님과 성경, 부활의 소망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의 중심으로 밝힌다.
  • 벨릭스는 말씀을 자주 듣지만 이익과 정치적 호의 때문에 정당한 판단을 미룬다.
함께 생각해요

부활의 소망은 바울의 현재 윤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설명 보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을 살피며 살게 한다. 미래의 생명과 심판은 현재의 책임을 피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 책임을 더 분명히 하는 근거이다.

함께 생각해요

벨릭스의 반복된 청취를 믿음의 성장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 보기

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결정을 미루고 뇌물을 기대하며 바울을 정치적 계산에 이용한다. 듣는 횟수와 실제 회개의 응답은 구별되어야 한다.

함께 읽는 성경

  • 고린도후서 8~9장: 여러 교회의 구제는 복음 안의 연대와 물질적인 책임을 보여 준다.
  • 야고보서 1:22~25: 말씀을 듣는 일과 행하는 응답을 구별하여 자기기만을 살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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