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8; 10~11장; 15:1~21; 28:17~31

이스라엘의 약속과 여러 민족의 참여

사도행전의 첫 신자들과 사도들은 유대인이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이스라엘의 성경을 통해 예수를 설명하며, 주님은 그들을 모든 민족을 향한 증인으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책을 유대교라는 어두운 세계에서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 이야기로 읽으면 주요 인물과 설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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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출발점에서 이스라엘을 지우지 않기

사도행전의 첫 신자들과 사도들은 유대인이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이스라엘의 성경을 통해 예수를 설명하며, 주님은 그들을 모든 민족을 향한 증인으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책을 유대교라는 어두운 세계에서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 이야기로 읽으면 주요 인물과 설교의 근거를 이해할 수 없다. 약속의 하나님은 자기 역사를 버리고 다른 신으로 바뀌지 않는다.

1장의 나라 회복 질문에 예수께서는 때와 시기를 알 권한보다 증인의 사명을 주신다. 이 응답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미래의 소망을 폐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질문을 현대의 어떤 국가 정책이나 일정과 곧바로 연결할 근거도 없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와 성령의 선물 아래, 제자들이 지금 해야 할 증언으로 시선을 돌린다.

식탁과 몸의 표지가 갖던 경계

고넬료 사건의 핵심은 이방인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추상적 허락만이 아니다. 베드로는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고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며 함께 머문다. 예루살렘의 질문도 함께 먹은 일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환대는 사람이 실제로 만날 수 있는지, 같은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바꾼다.

사마리아와 안디옥의 이야기에는 지역과 언어, 오래된 불신과 새로운 관계가 함께 있다. 이를 넘는다고 모든 문화적 차이가 없어져 한 집단의 생활 방식만 남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령의 동일한 선물은 차이를 열등함의 근거로 쓰지 못하게 한다. 공동체는 낯선 이가 자기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부르셨는지 듣는 훈련을 한다.

은혜의 동일함은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 자격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유대인인 자신들도 같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야고보는 다윗의 회복과 민족들의 참여를 성경의 약속 안에서 연결한다. 이것은 이방인이 먼저 민족적 개종을 완성해야만 그리스도께 속할 수 있다는 요구를 거절하는 판단이다.

동시에 편지는 우상숭배와 성적 부도덕에서 떠나고 함께 사는 이웃의 양심을 고려할 책임을 요청한다. 은혜를 민족적 조건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말과 생활의 윤리가 필요 없다는 말은 다르다. 각 문화의 모든 관습을 자동으로 옳다고 승인할 수도 없다. 복음은 모두를 같은 은혜로 부르면서 각자의 실제 삶이 주님과 이웃 앞에서 새로워지도록 요구한다.

거절의 장면을 집단 혐오로 바꾸지 않기

여러 도시에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반대하지만 많은 유대인도 믿는다. 이방인 가운데도 믿는 이와 군중을 선동하는 이, 이익을 잃고 폭력을 일으키는 이가 있다. 누가의 장면들은 민족에 따라 믿음과 악을 자동으로 나누지 않는다. 반대자를 비판하는 문장을 모든 시대의 유대인에게 물려주면 같은 책의 사도들과 믿는 이들을 지워 버리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도 바울은 자기 민족을 형제로 부르며 일부 청중은 믿고 일부는 거절한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보내졌다는 결론은 열린 선교의 길이지 민족적 우월성의 허가증이 아니다. 이사야의 완고함에 대한 경고도 오늘의 교회가 자기 귀와 마음을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고백은 다른 집단을 깔보게 하기보다 더 큰 감사와 환대, 정직한 증언으로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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