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28

신으로 오해받는 사도들과 환난 속의 공동체

회당에서 시작한 증언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로 이어진다. 반대의 폭력뿐 아니라 사도들을 신으로 높이는 환호도 복음의 뜻을 흐릴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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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에서 시작한 증언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로 이어진다. 반대의 폭력뿐 아니라 사도들을 신으로 높이는 환호도 복음의 뜻을 흐릴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믿음과 반대가 같은 도시에 함께 생기다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에서 말하고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는다. 반면 믿지 않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을 적대하게 한다. 누가는 응답의 차이를 같은 지역 안에 나란히 둔다. 특정 민족에 속하면 반드시 믿거나 반드시 거절한다는 구분이 성립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오래 머물며 은혜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고, 주님은 그들을 통해 표적을 행하게 하신다. 그러나 표적이 있으면 모든 반대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시가 갈리고 이방인과 유대인 가운데 지도자들과 함께 폭력을 계획하는 이들이 생긴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알고 다른 도시로 피한다. 피신은 말씀의 패배가 아니라 증언을 계속하기 위한 실제적인 판단이다.

일어나 걷는 사람에게 집중되는 시선

루스드라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는다. 바울은 그에게 회복될 믿음이 있음을 보고 일어서라고 하며, 그는 뛰어 걷는다. 장면은 3장에서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치유를 떠올리게 한다. 서로 다른 사역자가 같은 주님의 능력을 증언한다는 연결이 생긴다.

이 사람의 믿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은 모든 장애인에게 믿음이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누가는 그의 몸에 일어난 일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만 모든 질병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공식을 제시하지 않는다. 회복된 사람도 사도들의 위상을 높이는 소품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일상을 살게 된 한 인간으로 읽어야 한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라는 잘못된 환호

무리는 자신들의 언어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왔다고 외치며 바나바를 제우스, 주로 말한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부른다. 번역에 따라 로마식 이름인 주피터와 머큐리가 쓰이기도 하지만 같은 신들을 가리킨다. 청중은 놀라운 일을 자기들이 이미 가진 종교의 틀로 이해한다. 표적을 보았다는 사실과 복음의 의미를 알았다는 사실은 같지 않다.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져와 제사를 드리려 하자 사도들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든다. 그들은 환호를 적당히 받아 두면 전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계산하지 않는다. 복음의 봉사자가 신적인 대접을 받는 순간, 전하는 말의 내용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절해야 할 것은 박해자의 협박뿐 아니라 잘못된 경배가 주는 달콤한 권위이기도 하다.

성경을 모르는 청중에게 창조주를 소개하다

두 사도는 자신들도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밝히고, 헛된 것에서 돌이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한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설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었다면, 여기서는 청중이 경험하는 세계와 창조주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복음의 중심을 바꾸지 않으면서 설명의 시작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전 세대에 민족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두셨지만 비와 결실, 음식과 기쁨을 주시며 자신을 증언하셨다. 자연의 선물을 경험한다고 해서 모든 종교적 해석이 옳다는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그 선물을 주시는 분께 돌아오라는 요청이다. 사도들은 어렵게 제사를 막아 낸다. 바른 말을 한 번 전했다고 오해가 즉시 모두 풀리지는 않는다.

돌에 맞은 뒤 다시 찾아가는 공동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반대자들이 무리를 설득하고 바울은 돌에 맞아 성 밖으로 끌려간다. 그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누가는 실제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간다. 죽음에 가까운 위협 속에서도 곁에 서는 제자들의 존재가 기록된다.

더베에서 많은 제자를 얻은 뒤 두 사람은 위험했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한다. 새 지역에 도달한 횟수만이 선교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머물라고 권하며 많은 환난을 지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이 말은 피해를 찾아다니거나 폭력을 참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길에서 고난이 낯선 예외가 아님을 설명한다.

지도자를 세우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하다

두 사도는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한 뒤 신자들을 믿는 주님께 맡긴다. 지도력은 사람을 사도 개인에게 영원히 묶는 체제가 아니다. 지역 공동체가 지속해서 돌봄과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책임자를 세우되 최종적인 의존의 대상은 주님이심을 밝힌다. 구체적인 선출 절차는 본문이 말하는 범위 이상으로 확정하지 않아야 한다.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앗달리아를 거쳐 자신들을 은혜에 맡겨 보냈던 안디옥으로 돌아온다. 모인 교회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일과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일을 보고한다. 파송과 돌아옴, 위험과 돌봄, 지역 교회와 보내는 교회가 하나의 관계로 연결된다. 선교의 성과를 주님의 일하심과 공동체의 배움으로 돌려주는 결말이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표적은 주님을 증언하지만 청중의 오해와 반대를 자동으로 없애지 않는다.
  • 바울과 바나바는 신적인 경배를 거절하며 청중을 살아 계신 창조주께 돌린다.
  • 전도여행은 새 제자를 얻는 일과 기존 공동체를 굳게 하며 지도자를 세우는 일을 함께 포함한다.
함께 생각해요

사도들을 신으로 높이는 환호가 왜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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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봉사자를 경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그가 전하는 창조주와 주님의 자리를 가리기 때문이다. 환호가 인기를 높여 주더라도 복음의 의미를 왜곡하면 거절해야 한다.

함께 생각해요

위험했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 보기

제자들이 믿음 안에 머물고 환난을 이해하며 지속적인 돌봄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선교의 책임은 첫 반응을 얻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함께 읽는 성경

  • 사도행전 3:1~16: 베드로와 바울의 치유 장면은 모두 사도 개인의 능력보다 예수의 권세를 드러낸다.
  • 시편 104:10~24: 비와 결실, 생명을 돌보시는 창조주의 선하심을 성경의 찬양 안에서 더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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