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표적과 해결되지 않은 고난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사람을 보고 무리가 모이자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걷게 한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애니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고 말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으로 높이는 제사를 급히 막는다. 기적은 사역자를 예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자격증이…
표적의 중심은 사도의 능력 과시가 아니다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사람을 보고 무리가 모이자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걷게 한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애니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고 말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으로 높이는 제사를 급히 막는다. 기적은 사역자를 예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자격증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의 일하심을 가리키는 표적이다.
누가는 표적을 보았는데도 오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기록한다. 루스드라의 환호는 바울을 돌로 치는 폭력으로 바뀌고, 성전의 치유 뒤에는 사도들의 구금이 이어진다. 눈에 보이는 놀라움이 자동으로 믿음과 바른 이해를 낳지는 않는다. 표적을 해석하는 말씀과 회개의 요청, 주님의 정체를 설명하는 증언이 함께 필요한 이유이다.
몸과 관계의 회복을 함께 본다
치유받은 사람은 걷고 뛰며 예배하고, 다비다는 과부들에게 되돌려진다. 유두고의 회복 뒤에는 공동체가 크게 위로받았다는 결말이 온다. 표적의 열매는 추상적인 능력의 수치보다 한 사람의 몸과 그를 둘러싼 관계 안에서 나타난다. 다비다가 만든 옷을 보여 주는 과부들의 슬픔은 치유 이야기를 단순한 성공 사례로 소비하지 않게 한다.
질병과 장애를 특정한 죄나 믿음 부족의 표지로 읽을 근거가 모든 장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는 어떤 사람의 상태와 회복을 기록하지만 모든 인간의 병력을 설명하지 않는다. 회복되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말을 적용하여 정죄하면 본문이 주지 않은 인과관계를 만들어 낸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공동체는 먼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존엄한 사람으로 만나야 한다.
같은 주님을 섬겨도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죽임당하고 야고보는 칼에 죽지만 베드로는 감옥에서 구출된다. 같은 책 안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생존을 믿음의 크기로 계산하는 공식을 막는다. 야고보를 위해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다거나 스데반에게 능력이 부족했다는 설명은 기록되지 않는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증언하면서도 모든 상실의 이유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도와 치유를 기대하는 믿음은 결과를 통제하는 기술과 구별되어야 한다. 기도할 수 있고 치료와 실제 도움을 구할 수 있지만, 원하는 결과가 없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이의 잘못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바울 자신도 매질과 감옥, 폭풍을 겪으며 여러 사람의 돌봄을 받는다. 영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몸의 필요와 한계를 넘어선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보호를 위험의 재현 명령으로 바꾸지 않는다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물품에 항상 효험이 있다는 약속이 아니다. 독사에 우연히 물리고도 보호받은 사건은 일부러 위험을 만들어 믿음을 증명하라는 지시가 아니다. 유두고가 회복되었다고 높은 창가의 안전을 무시할 수도 없다. 서술된 표적을 반복 가능한 절차로 바꾸기 전에 누가 무엇을 명령하고 무엇을 단지 기록하는지 구별해야 한다.
궁극적인 소망은 특정 사역자가 살아 있는 동안만 작동하는 능력이나 모든 위기를 피하는 행운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주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복음이 소망의 중심이다. 그 소망은 슬픔을 금지하거나 피해를 감수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눈앞의 생명을 돌보고 부당함을 막으며, 회복과 상실의 자리에서 함께 주님을 의지할 공동체를 세우게 한다.
읽는 곳은 이 기기와 브라우저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