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평화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망으로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지를 설명한 바울은 그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면 현재 서 있는 자리와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도 바뀝니다. 이 변화는 환난이 사라졌다는 주장과 함께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 속에서 소망을 말할 근거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지를 설명한 바울은 그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면 현재 서 있는 자리와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도 바뀝니다. 이 변화는 환난이 사라졌다는 주장과 함께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 속에서 소망을 말할 근거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
5:1의 그러므로는 3~4장의 설명을 받아 옵니다. 의롭다 하심은 개인의 머릿속에만 있는 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제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관계를 말합니다. 여기서 평화는 마음이 언제나 잔잔한 감정 상태라기보다 적대와 정죄의 관계가 해소되었다는 객관적 차원을 먼저 가집니다.
그렇다고 내면의 평안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흔들릴 때에도 의지할 근거가 자신의 현재 감정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본의 표현은 평화를 누리자는 권면처럼 읽힐 여지도 있어 번역에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과의 평화가 인간의 자기 위로 기술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해진 관계라는 중심은 유지됩니다.
은혜 안에 서 있으며 영광을 기다립니다
5:2는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에 접근하고 그 안에 서 있다고 설명합니다. 은혜는 처음 신앙을 시작할 때만 사용한 입장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현재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성취로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4장의 품삯과 선물의 대비가 다시 뒤집힙니다. 바울은 지금 서 있는 관계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다고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합니다. 3:23에서 모든 사람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던 영광이 이제 미래의 소망이 됩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은혜, 미래의 영광이 한 흐름 안에 놓입니다. 신자는 이미 받은 것과 아직 기다리는 것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현재 구원이 실제라는 사실과 아직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환난을 기뻐한다는 말의 조심스러운 의미
5:3~4는 환난, 인내, 연단된 성품, 소망을 연결합니다. 바울이 고통 자체를 선하다고 부르거나 고통을 더 많이 받아야 가치 있는 신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은혜 안에 서 있는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드시 무효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설명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의 지속과 성숙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연결을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자동으로 성숙한다는 심리 법칙으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고통은 실제로 사람을 지치게 하고 관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소망은 곧이어 설명할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선물에 근거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뻐하라는 명령만 던지기보다 그를 지지하고 함께 견디는 공동체의 책임을 기억하는 적용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근거를 성령과 십자가에서 찾습니다
5:5는 소망이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는 이유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설명은, 이 소망이 사람의 낙관적인 기질에만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좁히기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행동으로 읽는 것이 뒤의 5:6~8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성령의 내적 사역과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 주신다고 말한 뒤 바울은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랑의 확신을 순간적인 감동의 강도로만 측정하지 않도록, 독자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행동으로 돌립니다. 동시에 그 사건이 과거의 정보로만 머물지 않고 성령을 통해 현재의 소망을 지탱한다고 말합니다.
연약한 자, 죄인, 원수였을 때
5:6~10에는 구원받기 전 인간을 설명하는 말이 이어집니다. 연약함, 경건하지 않음, 죄인, 원수라는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회복할 능력과 자격을 확보한 뒤 사랑받은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특히 5:8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개선에 대한 사후 보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기 전에 시작됩니다.
5:7은 좋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음을 택하기가 드문 인간의 현실을 비교합니다. 바울은 인간에게 희생적인 사랑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 행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우월감과 쉽게 결합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라는 말이 만드는 확신의 논리
5:9~10에서 바울은 더욱이라는 논리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제 화목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그분의 살아 계심을 통한 구원을 더 확실히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장벽이 있을 때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셨다면 그 행동이 현재의 연약함 때문에 갑자기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앞으로 어려움이나 심판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어진다는 식의 안일함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내 행동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무관심보다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가 확신의 중심입니다. 바울의 논증을 자기 확신의 크기만 바라보는 방식으로 바꾸면 바로 그 근거가 흐려집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의 관계적 방향
5:11은 화목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자랑이 배제되었다는 3:27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배제되는 것은 자기 성취나 신분을 자랑하는 태도이며, 여기서 기뻐하는 대상은 화목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은혜는 기쁨을 없애는 대신 기쁨의 중심을 바꿉니다.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가보다 누구와의 관계에 서 있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오늘 이 단락을 읽을 때에는 불안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를 신앙 실패로 단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감정의 흔들림이 있을 때 돌아갈 복음의 근거를 줍니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적대와 멸시를 아무렇지 않게 키우는 것은 이 은혜의 방향과 어긋납니다. 하나님이 먼저 원수에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는 일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도 질문을 던집니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과의 평화, 은혜 안에 서 있음, 미래 영광의 소망을 가져옵니다.
- 환난 속의 소망은 고통 자체의 가치보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 원수였을 때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신뢰할 근거가 됩니다.
5:3~5를 고통받는 사람에게 적용할 때 왜 환난만 강조하면 안 됩니까?
설명 보기
환난에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은혜 안에 서 있음, 성령의 선물,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고통이 자동으로 유익해진다는 공식이나 고통받는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5:9~10의 더욱이라는 말은 어떤 순서로 확신을 줍니까?
설명 보기
원수였을 때 하나님이 화목을 이루셨다면 이제 화목하게 된 사람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하실 것을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순서입니다. 확신의 근거는 자신의 완벽함보다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에 있습니다.
함께 읽는 성경
- 로마서 3:23~24; 8:18~39: 잃어버린 영광에서 소망하는 영광으로, 환난 속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논증이 이어집니다.
- 고린도후서 5:18~21: 하나님이 시작하신 화목과 그 화목에 응답하는 사명의 관계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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