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은사의 목적이며 끝까지 남는 길입니다
한 몸의 여러 은사를 말한 바울은 그 모든 선물이 어떤 길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랑의 장은 은사 논의에서 벗어난 삽입보다 그 논의를 판단하는 중심입니다.
한 몸의 여러 은사를 말한 바울은 그 모든 선물이 어떤 길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랑의 장은 은사 논의에서 벗어난 삽입보다 그 논의를 판단하는 중심입니다.
놀라운 능력도 사랑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13:1~3은 말과 예언, 지식과 믿음, 재산의 나눔과 몸의 희생을 가능한 한 크게 표현합니다. 사람과 천사의 말을 한다는 과장된 조건만으로 실제 방언의 언어 체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가장 놀랍다고 생각할 능력을 가정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람을 살리는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은사와 희생의 외형만으로 동기가 온전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몸을 내어 주는 마지막 표현은 불사름과 자랑을 가리키는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본문을 읽어도 극단적인 자기희생이나 그것을 통한 자랑마저 사랑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흐름은 같습니다. 모든 선행의 실제 결과가 물리적으로 사라진다는 뜻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를 자랑할 근거와 그 사람의 신실한 유익을 묻는 표현입니다. 사랑은 겉으로 큰일을 했다는 실적과 구별됩니다.
사랑은 관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13:4~5의 사랑은 오래 참음과 친절함으로 나타나며 시기와 자랑, 교만과 무례함, 자기 유익의 절대화를 거절합니다. 이는 추상적인 감정의 사전 정의보다 고린도 교회의 행동을 비추는 설명입니다. 사람의 이름으로 분파를 만들고 가난한 이를 수치스럽게 했던 모습은 이 사랑과 대조됩니다. 사랑이 많다고 느끼는가보다 실제로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성내지 않고 악을 계산해 두지 않는다는 말도 인간의 모든 감정과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상처를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에 책임을 묻는 일은 진실한 회복에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보복을 위해 상대의 빚을 쌓고 자기 유리함을 지키려는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피해자의 기억과 보호를 금지하면 관계의 책임을 거꾸로 사용하게 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에 무조건 승인하지 않습니다
13:6은 사랑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모든 것을 믿고 견딘다는 다음 말을 해석할 경계를 줍니다. 사랑은 어떤 주장이나 행동도 확인 없이 승인하는 순진함이 아닙니다. 남의 실패를 즐기며 자기를 높이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드러나는 일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교정과 사랑은 반드시 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13:7의 모든 것은 사랑이 포기하지 않는 깊이를 말하지만, 악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무제한 명령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소망과 인내는 상대를 변화 불가능한 존재로 미리 낙인찍지 않도록 하지만, 학대를 멈추고 거리를 두는 보호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회복을 바라보며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방향은 해악의 지속보다 사랑과 진리의 지속입니다.
부분적인 은사와 완성의 도래
13:8~10은 사랑과 달리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현재의 필요에 속하며 끝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식이 폐한다는 말이 장차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의 부분적인 앎과 전달의 방식이 완성 앞에서 달라집니다. 은사는 현재의 교회를 섬기는 선물이지 영원히 사람을 구별하는 신분표가 아닙니다.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는 교회 전통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하나님을 직접 아는 최종 완성으로 읽는 견해가 널리 제시되며, 교회의 성숙이나 정경의 완성과 연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단어 하나만으로 오늘의 모든 은사 논쟁을 끝내기보다 뒤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함, 온전히 앎이라는 설명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견해에서도 은사의 목적이 사랑이라는 현재의 요구는 남습니다.
어린아이와 거울의 비유
13:11~12은 어린 시절과 성숙, 거울로 보는 현재와 얼굴을 마주하는 미래를 대조합니다. 어린아이를 가치 없는 존재로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와 완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지금 실제로 알고 예언하더라도 그 앎은 부분적입니다. 자기 은사와 판단을 하나님의 전부처럼 내세우는 태도는 이 현재의 한계를 잊습니다.
장차 온전히 안다는 말도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은 무한한 지식을 소유한다는 선언으로 넓힐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이미 알려진 관계가 더 온전한 앎으로 완성될 소망을 말합니다. 불완전한 현재를 인정하는 일은 회의와 무관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 받은 선물을 소중히 사용하되 그 선물이 최종 완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은 그 기다림 속에서 계속 필요한 길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가장 큰 것
13:13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함께 남는 것으로 말하고 사랑이 가장 크다고 결론 내립니다. 이 말이 믿음이나 소망을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편지 전체가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을 기다리도록 요청합니다. 사랑은 현재의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게 하고 완성의 관계에서도 끝나지 않는 성격을 가집니다. 바울은 성도를 서로 다른 체험의 등급보다 이 사랑의 길로 부릅니다.
이 장은 혼인 예식에서도 귀하게 읽을 수 있지만 처음의 대상은 은사와 명예를 다투던 공동체입니다. 가족의 사랑만이 아니라 교회의 회의와 재정, 예배의 발언과 약한 지체를 대하는 태도까지 비춥니다. 다음 장이 다시 예언과 방언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칭찬한 뒤 은사를 자기 과시로 사용한다면 중심을 놓친 것입니다. 사랑의 길은 공동체가 실제로 세워지는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가장 뛰어난 능력과 큰 희생도 사랑을 대신하는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 사랑은 불의를 승인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관계에서 인내와 친절로 행동합니다.
- 현재의 부분적인 은사는 완성을 기다리는 선물이며 모든 은사의 사용은 끝까지 남는 사랑을 향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믿고 견딘다는 말은 잘못을 확인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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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합니다. 신뢰와 인내는 해악의 승인이나 피해자의 침묵과 구별됩니다.
사랑이 가장 크면 은사를 사모할 필요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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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장은 사랑을 추구하면서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없애기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길입니다.
함께 읽는 성경
- 고린도전서 8:1~13: 지식이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세워야 한다는 앞선 원칙이 더 풍성해집니다.
- 고린도전서 14:1~5: 사랑의 길이 예언과 방언의 실제 사용 기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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