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1~13:13; 고린도전서 14:1~40; 에베소서 2:19~22

은사의 지속과 중단, 분별의 공통 과제

12:3과 13절은 모든 성도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같은 성령 안에서 한 몸에 참여함을 설명합니다. 반면 29~30절은 모두가 같은 은사를 가지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특정 체험 하나가 없으면 성령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공통된 소속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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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소속과 특정 체험을 구별합니다

12:3과 13절은 모든 성도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같은 성령 안에서 한 몸에 참여함을 설명합니다. 반면 29~30절은 모두가 같은 은사를 가지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특정 체험 하나가 없으면 성령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공통된 소속과 이후의 충만 및 능력 체험을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따라 전통들의 설명이 달라집니다.

고전적 오순절의 대표인 하나님의 성회는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와 방언을 첫 외적 증거로 설명하며, 그 용도와 공적 은사의 용도를 구별합니다. 다른 전통들은 신자가 성령을 받는 일과 몸에 속하는 일을 더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충만과 은사의 다양성을 따로 설명합니다. 전자의 설명을 모든 사람이 같은 공적 방언 은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단순화하거나 후자를 성령 체험을 모두 부정한다고 요약하면 공정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적 기초를 강조하는 중단설

중단설의 주요 논증은 사도와 예언자의 기초적 역할과 계시의 완결성을 강조합니다. 일부 은사는 교회의 초기 복음을 확증하고 세우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 견해가 하나님이 지금 기도에 응답하거나 치유하실 수 없다는 주장과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일하시는 가능성과 특정 은사가 교회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직무로 주어졌다는 주장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속설은 신약의 교회들에 은사가 긍정적으로 주어지고 규제되었지만 모두 없애라는 명령은 없다는 점, 완성이 미래의 주님과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도적 복음의 권위와 오늘의 은사적 인도는 같지 않다고 설명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지속설 내부에도 예언의 정확성과 방언의 사용에 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단과 지속이라는 두 이름만으로 모든 해석을 빠짐없이 분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라는 논증의 한계

13:8~12은 현재의 부분적인 앎과 미래의 얼굴을 마주하는 앎을 대비합니다. 최종 완성으로 읽는 견해가 널리 제시되며, 정경이나 교회의 성숙과 연결해 온 설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완성으로 읽는 해석자들 사이에서도 그때까지 모든 은사가 같은 형태로 계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의 해석과 구속사 전체를 종합한 논증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논쟁에서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자료이지만 해석의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다는 보고가 정확히 무엇을 입증하는지 확인해야 하며, 보지 못했다는 개인의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을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의 문맥과 주장하는 현상의 내용, 검증 가능한 사실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확신의 강도와 근거의 강도는 항상 같지 않습니다.

어느 견해에서나 남는 사랑과 책임

14장은 이해와 통역, 순서와 자기 절제, 다른 사람의 분별을 요구합니다. 오늘의 적용이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 무조건적인 복종과 검증 면제를 요구할 근거는 없습니다. 13장은 가장 놀라운 은사도 사랑을 대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눈에 띄는 현상과 공동체의 건강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독자는 먼저 자기 전통의 결론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결론으로 사랑의 실천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이의 말을 알아듣게 설명하고, 약한 지체를 존중하며, 검증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랑을 낮추는 일은 모든 쪽에 필요합니다. 은사의 논쟁이 사람을 조롱하고 파당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자리로 바뀐다면, 양쪽 모두 이 편지가 교정하려던 고린도의 문제를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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