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불린 교회는 주님의 날을 기다립니다
바울은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고린도 교회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밝힙니다. 책망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실패의 목록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신실하심입니다.
바울은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고린도 교회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밝힙니다. 책망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실패의 목록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신실하심입니다.
편지를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소스데네와 함께 이름을 올려 보내는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기 권위를 스스로 만든 지도자의 지위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받은 사도적 부르심으로 설명합니다. 소스데네가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같은 이름의 인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서두에 이름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가 편지의 모든 문장을 공동 집필했다거나 특정 역할을 수행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도시 안에 자리한 공동체이지만 특정 후원자나 유명 설교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바울은 곧 분파를 다루므로 이 소유 관계는 단순한 격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함께 언급됩니다. 지역 교회의 선택은 더 넓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무관한 사적인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부르심
1:2에서 성도라는 이름은 문제 없는 사람만을 골라 부르는 칭호가 아닙니다. 뒤의 편지는 실제로 다툼과 성적 부도덕, 예배의 불평등을 다룹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로 불립니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었다는 정체성과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함께 있습니다. 바울은 행실이 충분히 좋아지면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우리의 주님이라는 표현도 소속의 독점을 막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그리스도를 가진 것처럼 다른 신자를 낮출 수 없습니다. 은혜와 평화는 이런 공동체를 향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관계의 출발점이며, 평화는 갈등이 잠시 숨겨진 상태보다 그 은혜 안에서 서로 바르게 연결되는 삶을 향합니다.
은사가 있다는 사실과 성숙은 다릅니다
바울은 1:4~7에서 은혜와 풍성한 말, 지식, 은사를 감사의 이유로 듭니다. 나중에 말과 지식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본래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이 공동체에 자리 잡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선물을 주셨습니다. 바울의 교정은 은사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그 은사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묻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부족한 은사가 없다는 말이 고린도 교회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는 판정은 아닙니다. 실제 은사를 가졌으면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선물이 풍성하다는 사실과 선물을 사랑으로 사용하는 성숙은 구별해야 합니다. 오늘도 설교나 지식, 특별한 체험의 풍성함만으로 공동체의 건강을 판단하면 이 편지가 드러내는 문제를 되풀이하기 쉽습니다.
현재의 선물은 미래의 주님을 향합니다
성도들은 이미 받은 은사만 바라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은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까지 공동체가 믿음으로 살도록 주어진 선물입니다. 현재의 체험이 완성의 전부가 아닙니다. 편지 마지막의 부활 논증도 이 미래와 이어집니다.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지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동체가 주님의 판단과 약속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1:8은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는 주님과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이를 어떤 생활을 해도 자동으로 안전하다는 보증으로 읽으면 뒤의 심각한 경고를 듣지 못합니다. 반대로 경고가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의미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확신을 주면서 그 확신에 합당한 삶으로 독자들을 부릅니다. 은혜와 책임은 편지 안에서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교제의 근거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1:9는 감사의 바탕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들을 아들과의 교제로 부르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교제는 함께 식사하는 친밀함을 포함할 수 있지만 그보다 넓게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분의 생명과 사역에 참여하는 관계입니다. 이후 성찬과 한 몸의 비유를 이해할 때 이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공동체의 하나 됨은 사람들의 취향이 잘 맞아서 생긴 결합을 넘어섭니다.
독자는 고린도 교회를 문제 많은 남의 교회로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두는 은혜를 받고도 성숙이 필요한 모든 공동체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감사하고, 그 선물을 주신 주님께 소속을 돌려드리며, 현재의 명성과 체험을 최종 판단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일은 자신을 자랑하는 자유보다 함께 받은 부르심에 충실할 이유가 됩니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교회는 유명 지도자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공동체입니다.
- 은사의 풍성함은 실제 은혜이지만 성숙한 사랑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주님의 다시 오심이 현재의 믿음과 책임을 지탱합니다.
문제가 많은 교회를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명 보기
그 이름은 완벽한 행실의 상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정체성을 말합니다. 그 정체성이 삶을 교정해야 할 근거입니다.
은사가 풍성하면 교회가 성숙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설명 보기
그럴 수 없습니다. 은사를 받는 것과 사랑으로 사용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편지는 선물을 인정하면서 사용의 목적과 관계를 바로잡습니다.
함께 읽는 성경
- 고린도전서 12:4~7: 다양한 은사의 출처와 공동의 유익이라는 목적이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 고린도전서 15:20~28: 기다리는 주님과 미래의 완성이 부활의 소망으로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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