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던 사람들을 한 몸과 한 집으로
은혜의 구원은 개인의 변화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방인 독자들은 이전의 소외를 기억하고, 십자가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했는지 보도록 초대받습니다.
은혜의 구원은 개인의 변화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방인 독자들은 이전의 소외를 기억하고, 십자가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했는지 보도록 초대받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라는 이유
2:11~12은 이방인 독자들에게 이전의 형편을 기억하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손으로 행한 몸의 표식에 따라 무할례자로 불렸고 이스라엘의 시민권과 약속의 언약들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설명은 유대인들이 누려 온 하나님의 약속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이 그 선물에 참여하게 된 놀라움을 이해하도록 이전의 거리를 보여 줍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목적은 수치심에 영원히 가두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제 누리는 소속이 원래 자기에게 당연했던 특권이나 더 나은 민족성의 결과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다는 표현도 이방인에게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는 통계적 설명은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던 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의 소속과 문화적 우월감을 구별해야 합니다.
가까워지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피
2:13의 이제라는 전환은 멀리 있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먼저 문화적 경계를 넘어 충분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얻은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새로운 관계를 여는 근거입니다. 이방인들은 끝까지 손님으로 머물도록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2:14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평화는 서로 싸움을 잠시 중단한 상태보다 깊습니다.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만드시는 인격과 행동이 그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도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을 낮은 자리로 고정한다면 이 선언과 실제 공동체의 관계 사이에 긴장이 생깁니다. 신앙의 내용은 관계를 다시 판단하게 합니다.
막힌 담과 율법의 문제
중간을 가로막는 담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의 접근을 제한하던 장벽의 그림자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이 특정 건축물 하나를 실제 철거했다는 기록은 아닙니다. 적대와 분리를 그리스도가 무너뜨리셨다는 비유입니다. 역사적 성전의 배경은 도움을 주지만 본문의 화해를 벽돌의 운명만으로 좁히지 않아야 합니다.
2:15의 계명과 규례로 된 율법을 폐하셨다는 표현은 해석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 언약 질서가 더 이상 두 집단의 소속을 가르는 규범으로 작동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해석과, 특히 경계와 적대를 형성하던 규례의 기능에 초점을 두는 해석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구약 전체가 악하거나 하나님의 도덕적 뜻이 사라졌다는 결론은 맞지 않습니다. 6:2~3은 율법의 계명을 다시 인용합니다.
하나의 새 인류와 하나님께 대한 화해
목표는 두 집단 중 하나가 다른 집단을 지워 버리는 승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람, 곧 새 인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유대인보다 더 우월한 새 주인으로 세우지도 않습니다. 2:16은 둘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관계와 하나님 앞의 관계가 같은 구원의 행동 안에서 연결됩니다.
십자가가 죽이는 대상은 상대편 사람들이 아니라 적대입니다. 이 표현은 신앙을 명분으로 다른 민족이나 집단을 공격하는 적용에 제동을 겁니다. 평화가 실제 삶에서 어려운 까닭을 모른 척하는 선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관계에 맞게 살아가라는 4장의 권면이 필요합니다. 받은 화해와 그 화해를 지키는 수고를 구별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나아간다
2:17~18은 멀리 있던 사람과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같은 평화가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이사야의 회복 언어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누구는 그리스도 없이도 아버지께 나아가고 누구만 별도의 중개가 필요한 구조가 아닙니다. 둘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한 성령 안에서 같은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시민권과 가족이라는 다음 비유는 이 평화의 결과를 생활의 소속으로 풉니다. 이방인은 더 이상 외부인과 체류자가 아니라 성도들과 같은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오늘의 특정 국가 시민권이나 정치적 경계를 곧바로 정하는 법률 문장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배경에 따라 이등 구성원을 만드는 관행을 돌아보게 하는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이 함께 자라는 성전
2:20~22은 사도와 예언자의 기초, 모퉁잇돌인 그리스도 위에서 함께 세워지는 건물을 그립니다. 3:5와 연결하면 예언자는 초기 교회의 성령 안의 증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물의 최종 중심은 특정 지도자의 개성이나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독자들은 따로 완성된 작은 건물이 아니라 함께 맞추어져 자랍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이제 이 공동체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역사와 성전을 조롱하는 우월성의 언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약속을 선물로 소개한 앞부분과 충돌합니다. 핵심은 성령 안에서 서로 다른 이들이 같은 거처로 세워진다는 사실입니다. 환대와 책임을 나누는 실제 관계가 그 고백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이방인은 자기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약속의 공동체에 가까워졌습니다.
- 그리스도는 두 집단의 적대를 없애고 둘 모두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시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 같은 시민과 가족이 된 이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함께 성전으로 세워집니다.
율법을 폐하셨다는 말은 구약이 악하다는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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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문맥의 중심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질서와 적대를 넘어 새 공동체를 만드심입니다. 편지는 뒤에서도 율법의 계명을 인용하므로 하나님의 뜻 전체가 사라졌다고 읽을 수 없습니다.
하나가 되려면 서로의 문화와 과거를 모두 잊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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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같은 은혜의 소속을 설명합니다. 차이가 우열의 자격이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역사와 문화가 한순간에 없어졌다고 가장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함께 읽는 성경
- 이사야 57:18~19: 먼 이와 가까운 이에게 전해지는 평화라는 회복의 언어가 배경을 이룹니다.
- 갈라디아서 3:26~29: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상속자가 된 이들의 지위를 다른 논증 안에서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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