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1:8~2:2;3:4~10;5:18

죄를 고백하는 자녀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

1:8~10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거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거나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2:1은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쓰지만 누가 죄를 지으면 의로우신 대언자가 계신다고 덧붙입니다. 같은 글의 3:6~9와 5:18은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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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언을 모두 받아들이기

1:8~10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거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거나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2:1은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쓰지만 누가 죄를 지으면 의로우신 대언자가 계신다고 덧붙입니다. 같은 글의 3:6~9와 5:18은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한쪽을 오류로 처리하거나 다른 쪽을 무시하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함께 말한 내용을 놓칩니다.

이 긴장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허가와 모든 신자가 현재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판정 사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전권은 신자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의지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죄를 자신의 정당한 소속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거부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정체는 죄와 아무 관계 없는 중립적인 명찰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은 죄에 대한 응답과 삶의 방향을 실제로 바꿉니다.

현재형 하나가 모든 문제를 풀지는 않는다

죄를 짓는다는 그리스어 표현의 현재형을 근거로 지속적이거나 습관적인 죄를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견해가 널리 쓰입니다. 3장의 행함과 소속의 대조를 잘 반영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현재형이 언제나 자동으로 습관적 행위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법 형태와 함께 단락의 논증을 살펴야 하며, 몇 번까지는 단발이고 몇 번부터는 습관인지 숫자로 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다른 설명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새 생명의 성격과 죄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정체의 선언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현실의 모든 실패를 목록화하기보다 어느 근원이 의와 사랑을 낳는지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도 현재의 책임을 추상적인 이상으로 약화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체를 강조하는 읽기와 지속적 행위를 강조하는 읽기는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어느 한 문법 공식으로 모든 난점을 제거했다고 말하지 않는 편이 정확합니다.

씨가 머문다는 말과 실제 회개

3:9의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지속을 설명하는 이미지입니다. 말씀이나 성령의 생명 사역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으나 본문은 씨의 대상을 별도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혈통이나 인간 안의 신적 물질을 뜻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그분을 거스르는 삶과 계속 충돌한다는 관계를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실수하거나 유혹을 느꼈다는 사실 하나로 자신이 결코 자녀가 아니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녀라는 이름을 이유로 고의적인 거짓과 미움, 착취를 보호하지도 않습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고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 의지하며 사랑과 의의 길로 돌아오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이 읽기는 진지한 자기 성찰을 유지하면서도 끝없는 자기 판정의 불안에 머물지 않게 합니다. 확신과 회개는 아들 안의 같은 생명에 대한 응답입니다.

실제 적용에서는 잘못을 발견했을 때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새로운 정체를 내세우는지, 절망을 확정하기 위해 자기 실패만 바라보는지, 아니면 죄를 인정하고 관계를 바로잡는 길을 구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요한일서는 죄 없는 척하는 고백을 거부하면서도 대언자의 사역을 함께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열매도 같은 신중함으로 살피되 그 사람의 모든 내면과 최종 상태를 알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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