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8~13; 디모데후서 2:19~26; 디모데후서 4:7~8

신실하심의 약속과 부인의 경고를 함께 듣기

2:11~13은 함께 죽음과 함께 삶, 인내와 함께 다스림, 부인과 부인당함, 인간의 불신실과 주님의 신실하심을 잇는다. 약속만 골라 읽으면 책임이 흐려지고 경고만 골라 읽으면 소망이 가려진다. 이 문장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고난을 견디라는 요청 뒤에 있다. 문법상의…

약 3분깊이 읽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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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문은 함께 읽어야 한다

2:11~13은 함께 죽음과 함께 삶, 인내와 함께 다스림, 부인과 부인당함, 인간의 불신실과 주님의 신실하심을 잇는다. 약속만 골라 읽으면 책임이 흐려지고 경고만 골라 읽으면 소망이 가려진다. 이 문장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고난을 견디라는 요청 뒤에 있다. 문법상의 조건 관계를 보존하면서 그것이 수신자에게 어떤 반응을 요청하는지 살펴야 한다.

함께 죽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로마서 6장의 언어와 연결된다. 현재의 고난과 죽음의 가능성을 더 부각하는 읽기도 있다. 어느 경우든 생명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자력의 성취가 아니다. 또한 함께 다스린다는 약속은 지금 다른 사람을 지배할 특권보다 장래에 그리스도께 참여할 소망을 말한다. 고난 속의 성도에게 무엇을 바라보며 견딜지 알려 준다.

경고를 지나치게 약화하지 않기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말은 엄중하다. 본문에 없는 상급만이라는 제한을 넣어 실제 관계의 경고를 없애기 어렵다. 두려움 때문에 말 한마디를 잘못한 모든 사람이 회복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도 없지만, 의도적인 부인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은 더더욱 나오지 않는다. 경고는 현재의 선택이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경고를 다른 사람의 최종 운명을 빠르게 판정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편지는 반대자에게도 회개를 주실 수 있다고 말하고 온유하게 교정하라고 한다. 교회는 잘못을 이름 붙여 말하면서 회복의 길도 열어 두어야 한다. 엄중함과 회개의 가능성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현재의 경고를 듣는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그 기능에 맞는다.

신실하심을 소망과 거룩함 안에서 읽기

13절의 신실하심은 주님의 성품이 인간의 실패 때문에 무너지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를 연약한 사람을 붙드시는 위로로 읽는 견해와, 주님이 심판을 포함한 자신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신다는 경고로 읽는 견해가 있다. 두 읽기는 바로 앞 경고와 성경에 반복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떤 순서로 연결하는지가 다르다. 문맥의 양면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결론은 하나님이 참되신 분이라는 고백이다. 그 참됨을 생각하면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고, 동시에 실패한 사람이 회개하여 의지할 분을 잃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확신은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자기 면제가 아니라 신실하신 주님께 돌아갈 근거다. 두려움은 심각함을 일깨울 수 있지만 주님의 성품을 잊게 하는 절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확신을 실제 순종과 연결하다

2:19에서도 같은 균형이 나타난다. 주님이 자기 사람을 아신다는 선언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요청이 함께 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은 불의를 방치하는 이유가 아니며, 불의를 떠나는 수고가 하나님보다 먼저 구원을 만든다는 뜻도 아니다. 선물과 책임의 관계를 유지하면 약속과 경고를 한쪽으로만 밀어붙이는 읽기를 줄일 수 있다.

실천에서는 자신의 최종 상태를 매일 추측하는 데 모든 힘을 쓰기보다 분명히 요청받은 방향에 응답할 수 있다. 거짓을 고치고, 온유하게 가르치고, 선한 일을 준비하며,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 넘어졌을 때에도 회개와 도움 요청을 미루지 않는다. 본문은 자신이 언제나 강하다는 자랑보다 주님이 신실하시기에 오늘의 책임을 다시 감당할 수 있다는 신뢰를 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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