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자리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인자를 보이십니다
은혜의 넉넉함을 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하면서도 여전히 높은 자리를 구합니다. 예수는 세 번째 수난 예고와 두 눈먼 이의 회복을 통해 나라의 왕권과 따름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은혜의 넉넉함을 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하면서도 여전히 높은 자리를 구합니다. 예수는 세 번째 수난 예고와 두 눈먼 이의 회복을 통해 나라의 왕권과 따름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설명하십니다. 세 번째 예고는 이전보다 구체적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을 겪으실 것입니다. 다만 사건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사흘째의 부활입니다. 독자는 다음 장의 환호를 이 예고와 함께 들어야 합니다.
넘겨짐이 거듭 나타나지만 그것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뒤의 수난 서사는 특정 지도자들의 결정과 로마 총독 및 군인의 실행을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를 모든 유대인이나 모든 로마인의 영원한 본성으로 확대하는 일은 인물의 선택과 본문의 범위를 지웁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아시면서도 길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고를 듣고도 영광의 자리를 구합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와 왕국의 좌우 자리를 청합니다. 어머니 혼자 자녀를 위해 움직인 장면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복수형으로 아들들에게 향하며, 그들도 할 수 있다고 응답합니다. 등장인물 사이의 책임을 살피지 않고 어머니의 과욕만 꾸짖으면 제자들의 문제를 비켜 가게 됩니다.
예수는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모른다고 하시며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묻습니다. 잔은 이 문맥에서 임박한 고난을 가리킵니다. 전통 사본과 번역에는 세례에 대한 표현도 있지만 중요한 초기 증거에서는 짧게 전해집니다. 제자들이 바라는 영광과 예수께서 통과하실 고난 사이의 간격이 질문으로 드러납니다.
고난의 참여도 지위를 거래하는 조건은 아닙니다
두 제자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예수는 그들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만 원하는 좌석을 보장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자리라는 대답은 충성을 보상표로 바꾸려는 계산을 멈추게 합니다. 고난에 참여했다는 사실조차 다른 이 위에 설 특권의 구매권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열 제자가 분개했다고 해서 그들은 서열 욕망에서 자유롭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곧이어 예수께서 모두를 불러 지도력의 원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두 사람의 노골적인 요청만 문제 삼기보다, 자기 자리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생긴 분노도 돌아보도록 초청됩니다. 경쟁의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권력의 문법을 섬김으로 바꾸십니다
예수는 통치자들이 사람을 지배하고 권세를 부리는 현실을 지적하며 제자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큰 이는 섬기는 자가 되고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실제 노예의 비참한 처지를 낭만화하라는 말이 아니라, 위에 서서 타인의 노동과 충성을 소비하려는 방향을 뒤집는 요청입니다.
섬김을 지도자가 겸손하게 보이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하면 본뜻을 놓칩니다. 누가 의사 결정의 이익을 얻고, 약한 이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며, 잘못한 권한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은 직무와 질서를 모두 없애기보다 그 직무가 누구의 유익을 위해 행사되는지 묻습니다. 높은 자리라는 표현보다 삶의 방향이 기준이 됩니다.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는 대속
28절은 섬김의 근거를 인자 자신에게 둡니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이를 위한 대속물로 주러 오셨습니다. 대속물은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는 값을 떠올리게 하며, 이사야 53장의 많은 이를 위한 종의 죽음과도 연결됩니다. 예수의 죽음에는 모범을 보여 주는 의미를 넘어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적 효력이 있습니다.
이 문장만으로 그 값이 누구에게 어떤 거래 방식으로 지불되었는지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많은 이라는 말만으로 구원받는 이의 정확한 숫자나 범위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대조는 한 분이 자신을 내어 주어 많은 이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자기희생은 이 구원을 반복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먼저 받은 구원을 따라 이웃을 섬기는 응답입니다.
길을 막는 무리와 길을 따르는 이들
여리고를 떠날 때 두 눈먼 사람이 다윗의 자손에게 긍휼을 구합니다. 무리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지만 그들은 더 크게 부릅니다. 앞의 어린이 장면처럼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의 접근을 막습니다. 마태가 두 사람을 기록한 것은 다른 복음서의 한 인물 서술과 먼저 구별해 읽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동행자의 사연을 만들어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는 멈추시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물으신 뒤 불쌍히 여겨 눈을 만지십니다. 그들은 보게 된 후 예수를 따릅니다. 높은 자리를 구한 제자들의 질문과, 볼 수 있기를 구한 이들의 질문이 나란히 놓입니다. 독자에게도 먼저 필요한 것은 주의 길을 원하는 대로 바꾸는 권력이 아니라, 그 길을 알아보고 따라갈 눈이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 대비를 기억하며 다음 입성 장면을 읽어 봅시다.
핵심을 다시 읽어요
-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길을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읽게 합니다.
- 제자 공동체의 지도력은 타인을 지배하는 자리보다 그들을 섬기는 책임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 인자는 생명을 내어 많은 이를 자유롭게 하시며, 회복된 이들은 그분을 따라갑니다.
잔을 마신다는 약속은 왜 높은 자리의 보장이 아닙니까?
설명 보기
고난의 참여조차 하나님 나라에서 타인보다 우월한 몫을 청구하는 거래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경쟁의 계산에서 아버지의 뜻과 섬김으로 돌리십니다.
두 눈먼 이의 요청은 두 제자의 요청과 어떻게 대비됩니까?
설명 보기
두 제자는 이미 자신들이 보는 나라의 그림 안에서 높은 자리를 구하지만, 두 사람은 볼 수 있도록 긍휼을 구하고 회복 후 따릅니다. 장면은 따름에 필요한 시야를 다시 묻게 합니다.
함께 읽는 성경
- 이사야 53:10~12: 많은 이를 위한 생명의 내어 줌은 고난받는 종의 구원 사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 마태복음 23:8~12: 가장 큰 이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지도력 비판에서 다시 강조됩니다.
읽는 곳은 이 기기와 브라우저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