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관계, 높은 자리를 주의 부르심 아래 둡니다
마태는 돈과 관계, 명예를 따로 떨어진 윤리 과목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무엇이 나의 안전과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지라는 충성의 문제가 흐릅니다. 재물을 섬기는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은 돈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보다, 돈이 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 …
가진 것이 나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돈과 관계, 명예를 따로 떨어진 윤리 과목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무엇이 나의 안전과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지라는 충성의 문제가 흐릅니다. 재물을 섬기는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은 돈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보다, 돈이 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부자 젊은이는 선한 일을 구하지만 자기 소유를 예수의 요청 아래 두는 데서 슬퍼집니다.
가난한 상태 자체가 모든 내적 갈등을 해결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는 베드로도 보상의 몫을 계산하고,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구합니다. 소유를 내려놓은 사실을 더 큰 특권을 얻는 투자로 만들면 지배하는 주인만 바뀐 듯 보일 뿐 계산의 논리는 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는 풍성한 약속과 함께 선후의 역전을 가르치십니다.
관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혼인에 관한 질문에서 예수는 버릴 수 있는 사유보다 하나님이 맺으시는 한 몸의 목적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배우자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유지하거나 처분하는 재산이 아닙니다. 신실함의 요청은 타인의 삶을 책임지는 관계로 자신을 보게 합니다. 독신도 미완성의 인간이라는 표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응답할 수 있는 부르심으로 인정됩니다.
동시에 관계를 귀히 여긴다는 이유로 폭력과 강압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혼인의 책임과 위험한 동거의 지속은 동일한 명제가 아닙니다. 안전한 분리, 사실과 책임의 확인, 혼인과 재혼에 대한 교회적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가정을 우상으로 만들면 그 안의 실제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잃고, 개인의 편의만 절대화하면 언약의 충실함을 잃게 됩니다.
자유는 이웃을 배려하는 데 사용됩니다
성전세 장면에서 예수는 아들로서 자유를 밝히면서도 불필요한 걸림을 피하기 위해 내게 하십니다. 자유가 언제나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모양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양보가 언제나 선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와 어린이를 가로막는 관행, 사람의 규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무효로 만드는 행동 앞에서는 분명히 대면하십니다.
따라서 적용의 질문은 내가 양보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누구의 몫을 양보했는가입니다. 자기 권리를 자발적으로 내려놓아 타인을 돕는 일과, 권한을 가진 사람이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요청을 남에게만 부과하면서 지도자는 이익을 누린다면, 제자의 자유와 섬김을 권력 유지의 언어로 뒤집는 셈입니다.
섬김은 구원을 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인자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다는 선언은 섬김의 근거를 제자의 도덕적 우수함보다 예수의 구원 사역에 둡니다. 제자가 고통을 많이 겪어야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받은 생명에 기대어, 돈과 시간과 능력과 권한을 타인의 유익에 사용할 길이 열립니다. 부유한 요셉이 무덤을 제공하는 장면은 소유가 섬김의 자원이 되는 구체적인 예입니다.
실천을 위해 모든 재산과 관계를 한꺼번에 바꾸겠다는 거대한 결의만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재정 결정을 할 때 가난한 이의 필요가 포함되는지, 가족의 말에 실제 귀 기울이는지, 맡은 직무가 다른 이의 삶을 더 살게 하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잃을까 두려운 것을 정직하게 주께 아뢰며 응답의 길을 찾으십시오. 부르심은 나의 존재를 지우는 명령이 아니라 그 존재와 소유를 주 안에서 바르게 사용하도록 이끄는 초청입니다.
읽는 곳은 이 기기와 브라우저에 저장됩니다.